새로운 피렌체 투어를 소개합니다

새로운 피렌체 투어를 소개합니다.

베키오 다리 위의 살인 사건 ( Ponte Vecchio, 폰테 베키오)


베키오 다리는 피렌체에서 아름답고 유명한 곳으로 손꼽히지만, 또 그만큼 '할 말'이 참 많은 다리이다.
일단,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다리 중의 하나인 베키오 다리는 그 기원을 기원전부터 찾을 수 있으나 실제 현재의 다리가 세워진 것은 1345년 경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고려말 공민왕이 왕위에 오르기 직전.
베키오 다리는 피렌체와 함께 '살아온' 다리이다.
오랜 시간 동안 함께 숨 쉬면서 찬란한 피렌체, 위기의 피렌체 그리고 현재의 피렌체까지 지켜봐 왔다.
그만큼 베키오 다리가 품은 이야기는 매우 많다.
1565년 만들어진 베키오 다리 위를 통과하는 바사리의 복도, 다리 위의 건물들과 귀금속 가게들 그리고 나치의 폭격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일화 등등….
그중에서도 실제 피렌체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실화가 있다.

Buondelmonte de' Buondelmonti 살인 사건

바로 베키오 다리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중세의 피렌체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가 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1216년 1월 피렌체의 어떤 연회에서 비롯되었다.
연회 주인공의 기사 작위 축하파티를 위해 피렌체의 모든 귀족들과 주요 가문들을 초대되었다.
연회는 술과 음식들과 함께 즐겁게 계속되었고 마침 광대가 흥을 돋우고 있었다.
이때 광대가 귀족들 앞에 있는 음식 그릇을 빼앗았다. 광대의 장난을 이해 못하고 화가 난 Buondelmonti 가의
Buondelmonte( 정말 상상력 넘치는 이름이다. 예를 들면 김씨의 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고 이를 본 여러 귀족들이 한마디씩 껴들어 결국에는 여러 가문들의 싸움으로 번졌다.
연회가 끝나고도 싸움은 지속되었고 급기야 칼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중 Buondelmonti의 칼에 Fifanti 가문의 Odarrigo가 맞아 팔을 베이게 되었다.
당시의 관습대로 피해자 Fifanti 가문의 대부분의 형제 가문들이( Uberti, Amidei, Lamberti, Gangalandi...) 참석한 가운데 사건 해결 위원회가 열렸고 사건은 두가문의 평화적 혼인으로 마무리 되었다.
즉 가해자 Buondelmonte와 피해자 Odarrigo de' Fifanti의 조카이자 형제 가문인 Amidei 가문의 딸과 혼인하게 되었다. 바로 Buondelmonti 가문과 Amidei 가문은 혼인 계약을 하고 이를 지키지 않을 시에는 많은 벌금을 내는 것에 동의하고 공증을 하였다.
* 거의 대부분의 귀족이나 명문가의 혼인은 가문의 명예와 이익이 우선되는 일종의 '가문간의 계약' 이었다.

이로써 모든 게 평화적으로 마무리가 될 때 Buondelmonte를 찾아간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그의 형제가문인 Donati 가문의 안방마님으로 "어떻게 상대가문의 위협에 못 이겨 혼인을 할 수가 있는냐, 그 집 딸내미가 얼마나 못생겼는지 아느냐?" 하면서 그를 부추기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이미 아름답기로 소문난 자신의 딸과의 혼인을 제안했고, 혼인 계약 파기 시 내야 하는 벌금도 대신 내어 주기로 하였다. 그로서는 손해 볼 것 없는, 오히려 쌍수를 들어 환영할 혼인이었다.

1216년 2월 10일, Buondelmonte는 Santo Stefano 성당에서 거행하는 자신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고 그날 당일 Donati 가문과 새로운 혼인 계약을 하기 위해 신부가 기다리는 성당 부근을 유유히 지나갔다.

이 날은 Amidei가문과 그의 형제 가문들에게는 매우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날이 되었다.
급히 가문들의 수장들이 모였고, 괘씸한 Buondelmonte를 처벌하기 위해 회의를 시작하였다.
...엄청난 벌금을 매기자... 벌금은 딴 가문에서 이미 내 준다더라. 차라리 죽기 직전까지 패자...아니다 그걸로 약하다. 얼굴에 칼자국을 내서 평생 벌 받게 하자 등등 의견이 분분할 때 Lamberti의 수장이 일어났다.
" Cosa fatto capo ha" 라고 외치면서(피렌체의 유명한 말로 풀이하면 어떤 일엔 반드시 배후가 있다는 뜻) Buondelmonte를 살해할 것을 제안한다.

그로 부터 두 달여 뒤 부활절날 아침이 되었다. Buondelmonte는 Donati 가문의 딸과의 결혼식을 위해 말 위에 올랐다. 피렌체를 동서로 가로질러 흐르는 아르노 강의 남쪽에 살던 Buondelmonte는 성 안의 자신의 결혼식이 열리는 성당에 가기 위해 베키오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이 때의 피렌체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남쪽에서 피렌체 시내 안으로 들어가는 거의 유일한 통로는 베키오 다리였다.)
바로 이때 다리에 숨어 있던 Amidei의 형제 가문들의 사람들에 의해 공격을 받아 말에서 떨어진 Buondelmonte는 다시 칼에 맞았다. 자신의 결혼식을 위해 호화롭게 차려입은 그는 그렇게 부활절 자신의 결혼식 날 아침에 베키오 다리에서 죽음을 맞았다.

이 사건은 그저 한 젊은이의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두 가문이 대표하는 두 개의 거대한 가문 연합의 싸움으로 이어졌고, 이때부터 피렌체는 두 개의 파로 찢어지게 되었다. 당시 중세 유럽은 교황파(Guelfi)와 황제파(Ghibellini)로 나눠 전쟁하던 시기였다. 황제파를 지지하던 Uberti, Lamberti, Amidei 가문들에 반대하기 위해 정치적 성향보다는 반황제파가 되기 위해 Buondelmonti, Danati, Pazzi 등의 가문들은 교황파가 되었고 이때를 시작으로 피렌체는 100여 년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당파 전쟁이 시작되었다.

나중에 교황파가 승리하여 황제파들은 대부분 숙청되어 사실상 사라지게 되고, 피렌체 실권을 잡은 교황파는 다시 백 당과 흑 당으로 나누어 당파 전쟁을 이어간다.
*12세기 말에 단테는 백 당으로 정치에 입문한다. 상대파인 흑 당이 교황 Bonifacio VIII와의 연합으로 백 당을 몰아내고, 백 당이었던 단테는 사형 선고와 함께 영원히 추방을 당해 다시는 사랑하는 피렌체 땅을 밟지 못하고 죽는다. 나중에 단테와 베아트리체 이야기는 다시 자세하게 다루기로 한다.


                                                      중세의 결혼식 풍경


                             Amidei가문의 주거용 탑(피렌체 시뇨리아 광장 근처)


                              Buondelmonti 가문의 주거용 탑(피렌체 베키오 다리 근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