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피렌체 투어를 소개합니다

새로운 피렌체 투어를 소개합니다.

토스카나 개인 맞춤 투어 <가고 싶은 곳만 골라 하는 나만의 투어>



                   


내가 가고 싶은 곳만 골라 만든 나만의 테마 여행  

토스카나 개인 맞춤 투어

내가 원하는 코스와 일정으로 만든 '나만의 테마 여행'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역와 피렌체를 즐기세요. 
정해진 코스와 일정으로 따라만 다니는 여행 힘드셨죠? 
이제 당신이 원하는 테마로 여행할 수 있습니다. 
오랜 현지 경험과 다양한 경력으로 자신 있게 런칭하는 '개인 맞춤 투어'입니다. 
하고 싶은 테마 여행이나 가고 싶은 곳이 있으시면 바로 코스와 일정에 맞춰 여행 플랜을 짜 드립니다. 
신혼부부의 허니문 여행, 가족 여행 또는 친구들의 추억여행으로 강추합니다. 
코스 내용에 상관없이 팀당 반나절 또는 풀데이 가이드비를 받기 때문에 여러 코스를 동시에 진행할 수 있습니다. 
투어가 진행되는 동안 개인 가이드가 투어 안내는 물론 필요시 통역을 도와드립니다.
예시)
 반나절 투어
1. 피렌체 시내 투어+우피치 미술관 투어
2. 쇼핑 투어 (The Mall, 프라다 스페이스)
3. 피사 투어 ....
 풀데이 투어
1. 피렌체 시내 투어+ 우피치 미술관 +가죽 시장,재래시장+ 두오모 성당 내부 및 쿠폴라 + 야경 안내 + 맛집 탐방 
2. 박물관 투어 (우피치, 아카데미아,피티궁전,베키오 궁전 등등) 
3. 성당 투어 (두오모 대성당, 산타 그로체, 산타마리아노벨라 등등) 
4. 토스카나 와인 투어 (와이너리 방문 투어과 시음, 토스카나 전원 드라이브) 
5. 토스카나 도시 투어 ( 시에나, 산지미냐노, 루카, 키안티 ,코르토나, 발도르차, 피엔차 등등) 


포함 사항



*풀데이 (약 9시간 )팀당 250 유로 ,1-5인 기준
*반나절 (약 4시간 반 -5시간) 팀당 160 유로, 1-5인 기준
* 투어 인원이 6인 이상인 경우 1인당 30 유로 추가 인원 요금
*만 7세이하의 아동은 추가 인원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불포함 사항

 *개인 여행 경비나 차비, 식사비,시음비, 추가 비용, 박물관비등은 투어비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전용 차량 서비스가 필요한 경우 (반나절 100유로, 풀데이 150유로) 추가 비용이 듭니다.
 *투어 상담 (코스, 일정, 견적)은 무료입니다. 아래 연락처로 문의하세요.

연락처
 카카오: toscanafirenze
이메 일: firenzearte@naver.com



경력

* 피렌체 국립 미술원 졸업(화가 경력) 
* 국가 인증 피렌체 공인 가이드 자격증 
* 우피치 미술관 전문가 과정 수료 
* AIS (이탈리아 소믈리에르 협회) 회원, 
전문 Sommlier 과정 이수 중 
* 한국어, 이탈리아어 공식 전문 통역 
CILS (이태리어 인증 시험) 레벨 TRE-C1취득 





우피치에 다시 돌아온 잠자는 미녀 아리아드네


거대한 잠자는 미녀 아리아드네가 220년 만에 우피치로 돌아왔다.
여기저기 많은 곳을 떠돌다 드디어 1787년 처음 피렌체로 왔을 때 있었던 자기 자리로 되돌아온 곳이다.


                     
                                     란치 회랑 위쪽을 통해서 안으로 옮겨지는 아리아드네

'잠이 든 아리아드네 ( Arianna addormentata )' 는 그리스 헬레니즘 조각을 본떠 만든 기원전 3세기 로마 시대 작품이다. 그리스미술의 영향으로 시작된 로마 시대 대부분의 조각은 최고의 이상적 미를 보여주는 그리스 헬레니즘 청동 조각들을 대리석으로 모방, 제작하였고, 조각품들은 거리나 관공서, 저택 등을 장식하는 데 쓰였다.

15세기 후반에 로마에서 발굴된 '잠이 든 아리아드네'는 피렌체의 대공 페르디난노 I 세가 로마 추기경 시절에 로마의 메디치 별장 (Villa Medici sub Pincio a Roma) 정원을 위해 구입하였다.

이후 대가 끊긴 메디치 가문을 대신 오스트리아의 황족 로렌 가문이 토스카나의 대공가가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메디치의 재산과 예술품 또한 그들의 소유가 되었다.
* 소유만 할 수 있었지 절대로 피렌체 밖엔 그림 한 장 가지고 나갈 수 없었다.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혈육인 안나 마리아 루이사 데 메디치 ( Anna Maria Luisa de' Medici )는 죽기 전
'가문 협정 ( Patto di Famiglia )' 을 통해 메디치의 유산을 지켜냈다.

로렌 가문은 로마의 피렌체 별장을 팔기로 하고 별장 안에 있었던 많은 예술품은 모두 피렌체로 가지고 왔다.
대부분은 정원을 장식하던 조각품들이었다. 현재는 시뇨리아 광장의 란치 회랑, 피티 궁전, 우피치 미술관을 등을 장식하고 있다. 이 중에 끼어있던 조각품 중의 하나가 바로 아리아드네이다.

1787년 우피치에 입성한 후 여러 가지 이유로 피렌체의 여러 곳을 돌다가 2012년 11월 26일, 220년 만에 드디어 우피치 미술관의 미켈란젤로 방에서 우리에게 모습을 보인다.
첫인상으론 매우 크고 육중한 대리석의 무게가 단박에 느껴진다. 하지만 우리의 눈은 부드럽고 고혹적인 몸의 윤곽과 실제와 같은 섬세한 옷 주름 표현에 놀란다.
자세히 그녀의 얼굴을 보니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요염한 자세로 잠이 든 아리아드네가 천진스럽다기만 하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리아드네는 크레타 섬의 공주였다. 그의 아버지인 미노스 왕은 자기 부인이 황소와 관계하며 낳은 자식 (신화니까….*^)인 황소 인간인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아무도 빠져나올 수 없는 미로에 넣고 해마다 남녀 각각 7명의 아테네 젊은이들을 제물로 바친다.

이에 분노한 아테나의 왕자 테세우스가 인질을 구하고 괴물을 죽이러 크레타 섬에 도착하고 바로 아리아드네와 사랑에 빠진다. 사랑에 빠진 아리아드네는 미로를 빠져나올 수 있는 붉은 실타래와 괴물을 죽일 수 있는 칼을 그에게 준다. 아리아드네 덕에 괴물을 죽이고 인질을 구출한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와 함께 섬을 빠져나와 낙소스 섬에 도착하지만 그곳에서 그는 잠이 든 아리아드네를 버리고 떠난다. ( 여러 가지 버전이 있지만 ) 버려진 채 잠이 든 아리아드네를 본 지나가던 디오니소스 ( 술의 신 박카스 )가 그녀를 아내로 맞는다."

그러니까 자신의 부모, 형제, 고향을 버리고 택한 사랑한 남자한테 버림받고, 아니 버림받은 지도 모르고 막 잠이 든 모습이다. 이렇게 알고 보면 '잠이 든 아리아드네'는 꽤 극적인 조각품이다. 게다가 바티칸 박물관에도 거의 흡사한 또 다른 아리아드네가 있다.
궁금한 건 왜 기원전 그리스인들이나 로마인들은 이런 주제를 택해서 조각했을까? 왜 하필이면 버림받은 이 순간, 잠이 든 아리아드네을 그렸을까……. 그게 궁금하다.




베키오 다리 위의 살인 사건 ( Ponte Vecchio, 폰테 베키오)


베키오 다리는 피렌체에서 아름답고 유명한 곳으로 손꼽히지만, 또 그만큼 '할 말'이 참 많은 다리이다.
일단,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다리 중의 하나인 베키오 다리는 그 기원을 기원전부터 찾을 수 있으나 실제 현재의 다리가 세워진 것은 1345년 경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고려말 공민왕이 왕위에 오르기 직전.
베키오 다리는 피렌체와 함께 '살아온' 다리이다.
오랜 시간 동안 함께 숨 쉬면서 찬란한 피렌체, 위기의 피렌체 그리고 현재의 피렌체까지 지켜봐 왔다.
그만큼 베키오 다리가 품은 이야기는 매우 많다.
1565년 만들어진 베키오 다리 위를 통과하는 바사리의 복도, 다리 위의 건물들과 귀금속 가게들 그리고 나치의 폭격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일화 등등….
그중에서도 실제 피렌체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실화가 있다.

Buondelmonte de' Buondelmonti 살인 사건

바로 베키오 다리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중세의 피렌체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가 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1216년 1월 피렌체의 어떤 연회에서 비롯되었다.
연회 주인공의 기사 작위 축하파티를 위해 피렌체의 모든 귀족들과 주요 가문들을 초대되었다.
연회는 술과 음식들과 함께 즐겁게 계속되었고 마침 광대가 흥을 돋우고 있었다.
이때 광대가 귀족들 앞에 있는 음식 그릇을 빼앗았다. 광대의 장난을 이해 못하고 화가 난 Buondelmonti 가의
Buondelmonte( 정말 상상력 넘치는 이름이다. 예를 들면 김씨의 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고 이를 본 여러 귀족들이 한마디씩 껴들어 결국에는 여러 가문들의 싸움으로 번졌다.
연회가 끝나고도 싸움은 지속되었고 급기야 칼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중 Buondelmonti의 칼에 Fifanti 가문의 Odarrigo가 맞아 팔을 베이게 되었다.
당시의 관습대로 피해자 Fifanti 가문의 대부분의 형제 가문들이( Uberti, Amidei, Lamberti, Gangalandi...) 참석한 가운데 사건 해결 위원회가 열렸고 사건은 두가문의 평화적 혼인으로 마무리 되었다.
즉 가해자 Buondelmonte와 피해자 Odarrigo de' Fifanti의 조카이자 형제 가문인 Amidei 가문의 딸과 혼인하게 되었다. 바로 Buondelmonti 가문과 Amidei 가문은 혼인 계약을 하고 이를 지키지 않을 시에는 많은 벌금을 내는 것에 동의하고 공증을 하였다.
* 거의 대부분의 귀족이나 명문가의 혼인은 가문의 명예와 이익이 우선되는 일종의 '가문간의 계약' 이었다.

이로써 모든 게 평화적으로 마무리가 될 때 Buondelmonte를 찾아간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그의 형제가문인 Donati 가문의 안방마님으로 "어떻게 상대가문의 위협에 못 이겨 혼인을 할 수가 있는냐, 그 집 딸내미가 얼마나 못생겼는지 아느냐?" 하면서 그를 부추기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이미 아름답기로 소문난 자신의 딸과의 혼인을 제안했고, 혼인 계약 파기 시 내야 하는 벌금도 대신 내어 주기로 하였다. 그로서는 손해 볼 것 없는, 오히려 쌍수를 들어 환영할 혼인이었다.

1216년 2월 10일, Buondelmonte는 Santo Stefano 성당에서 거행하는 자신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고 그날 당일 Donati 가문과 새로운 혼인 계약을 하기 위해 신부가 기다리는 성당 부근을 유유히 지나갔다.

이 날은 Amidei가문과 그의 형제 가문들에게는 매우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날이 되었다.
급히 가문들의 수장들이 모였고, 괘씸한 Buondelmonte를 처벌하기 위해 회의를 시작하였다.
...엄청난 벌금을 매기자... 벌금은 딴 가문에서 이미 내 준다더라. 차라리 죽기 직전까지 패자...아니다 그걸로 약하다. 얼굴에 칼자국을 내서 평생 벌 받게 하자 등등 의견이 분분할 때 Lamberti의 수장이 일어났다.
" Cosa fatto capo ha" 라고 외치면서(피렌체의 유명한 말로 풀이하면 어떤 일엔 반드시 배후가 있다는 뜻) Buondelmonte를 살해할 것을 제안한다.

그로 부터 두 달여 뒤 부활절날 아침이 되었다. Buondelmonte는 Donati 가문의 딸과의 결혼식을 위해 말 위에 올랐다. 피렌체를 동서로 가로질러 흐르는 아르노 강의 남쪽에 살던 Buondelmonte는 성 안의 자신의 결혼식이 열리는 성당에 가기 위해 베키오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이 때의 피렌체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남쪽에서 피렌체 시내 안으로 들어가는 거의 유일한 통로는 베키오 다리였다.)
바로 이때 다리에 숨어 있던 Amidei의 형제 가문들의 사람들에 의해 공격을 받아 말에서 떨어진 Buondelmonte는 다시 칼에 맞았다. 자신의 결혼식을 위해 호화롭게 차려입은 그는 그렇게 부활절 자신의 결혼식 날 아침에 베키오 다리에서 죽음을 맞았다.

이 사건은 그저 한 젊은이의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두 가문이 대표하는 두 개의 거대한 가문 연합의 싸움으로 이어졌고, 이때부터 피렌체는 두 개의 파로 찢어지게 되었다. 당시 중세 유럽은 교황파(Guelfi)와 황제파(Ghibellini)로 나눠 전쟁하던 시기였다. 황제파를 지지하던 Uberti, Lamberti, Amidei 가문들에 반대하기 위해 정치적 성향보다는 반황제파가 되기 위해 Buondelmonti, Danati, Pazzi 등의 가문들은 교황파가 되었고 이때를 시작으로 피렌체는 100여 년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당파 전쟁이 시작되었다.

나중에 교황파가 승리하여 황제파들은 대부분 숙청되어 사실상 사라지게 되고, 피렌체 실권을 잡은 교황파는 다시 백 당과 흑 당으로 나누어 당파 전쟁을 이어간다.
*12세기 말에 단테는 백 당으로 정치에 입문한다. 상대파인 흑 당이 교황 Bonifacio VIII와의 연합으로 백 당을 몰아내고, 백 당이었던 단테는 사형 선고와 함께 영원히 추방을 당해 다시는 사랑하는 피렌체 땅을 밟지 못하고 죽는다. 나중에 단테와 베아트리체 이야기는 다시 자세하게 다루기로 한다.


                                                      중세의 결혼식 풍경


                             Amidei가문의 주거용 탑(피렌체 시뇨리아 광장 근처)


                              Buondelmonti 가문의 주거용 탑(피렌체 베키오 다리 근처)

피렌체 와인 농장 방문 IL MULINO DI GRACE

정말 와도 너무 온다 싶을 정도로 끊임없이 비가 내리는 오늘 포도주 농장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래서 직접 찍은 사진이 적다. (맨 위 두 사진은 사이트에서 퍼 옴)
피렌체 시내에서 차로 약 한 시간을 달려 키안티(Chianti)의 판차노(Panzano) 지역에 있는 농장에 도착했다. 굉장히 특이한 ( 한 예술가가 직접 제작한 문) 문을 통과해서 한 50미터 정도 더 들어가니 건물이 보인다.

오늘 방문한 농장은 포도주를 직접 생산하고 혼합부터 병에 담음, 포장까지 농장 안에서 손수 이뤄지는 꽤 실속있는 곳이다. 포도주의 이동이 미비 하므로 그만큼 포도주가 받는 스트레스도 적다고 한다.
350여 년 된 포도밭과 19세기의 방앗간을 고쳐 1995년 최신식 설비를 갖춘 농장이 되었다.
키안티에서도 황금지역에 속하는 Panzano에 위치한 농장이기에 시음을 하기 전에 꽤 기대가 되었다.
Red 와인만 생산하는 이곳의 주 품종은 거의 산조뵈제(Sangiovese)다.
농장 내부의 포도주 제조 시설과 숙성실등을 한 사십분 여를 견학했다.
우리 그룹 사람들의 대부분이 이탈리아 Sommelier (3명) 이거나 또는 소믈리에 수업을 듣거나 상당한 와인 전문가들이라 기본적인 설명은 건너뛰고 꽤 전문적인 설명을 많이 해 주셨다.
국내 수요 뿐 아니라 영국, 미국에 많이 수출하고 최근에는 중국에도 수출을 한다고 한다.

견학을 마치고 마침내 시음하는 장소로 자리를 옮겼다.
비가 많이 와 차로 이동을 했다. 하지만 날이 좋다면 언덕위에 넓게 펼처진 포도밭 사이를 가로질러 걷는다면 한 5분 거리이다. 굉장히 아름다운 전통식으로 지어진 별장같다.

키안티 클래식을 주로 생산하는 곳이라 종류는 많지 않다.
종류별로 한가지씩 세 종류의 와인을 시음했다.

1. Chianti Cassico DOCG 2009
2. Chianti Classico Riserva DOCG 2006
3. IGT Gratius 2007

다들 즐겁게 와인 평가와 농담을 주고 받으면 즐거운 시음회였다.
나의 평가도 대부분의 사람들과 비슷했지만 개인적으로는 특히 3번이 제일 맛있었다.
산조베제의 특유의 향과 깔끔하게 잇몸을 조여주는 타닌이 조금 더 두드러져 앞으로의 2-3년이 기대가 되는 꽤 좋은 와인들이였다.
시중 판매가를 물어보니 대부분 20-30 Euro정도로 가격도 꽤 좋았다. ( 물론 이탈리아 내에서)

가격도 부담스럽지 않고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좋은 키안티.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꽤 실속있는 농장이였다.















Ginevra degli Almieri의 전설

피렌체의 사랑 이야기 1 (Ginevra degli Almieri)

실화인지 허구인지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이 사랑 이야기는 책이나 연극에서 계속 회자 되었고 1936에는 'Ginevra deli Almieri'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던 꽤 유명한 전설이다.
때는 1396년, 한 참 인문주의가 동트던 피렌체에 아름다운 Ginevra degli Almieri ( Almieri 가문의 지네브라) 가 살고 있었다.
피렌체 두오모 근처에 살던 그녀는 아리따운 외모에 고운 마음씨, 명석한 두뇌, 고귀한 품위까지 고루 갖춰 피렌체 시민의 사랑을 한몸에 받던 한마디로 고전적 여주인공의 전형이었다.
한창때인 열여덟의 Ginevra는 많은 청년의 청혼을 받고 있지만 우리의 절개 있는 주인공의 심장은 한 남자만을 위해 뛰었으니 그의 이름은 Antonio Rondinelli (Rondinelli 가문의 안토니오)였다.
그들의 사랑은 Ginevra의 아버지 Bernardo(베르나르도)가 그녀를 Agolanti(아고란티)가문의 아들인
나이 많은 Francesco(프란체스코)와 혼인을 성사시키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딸의 마음보단 가문의 사업과 돈이 더 중요했던 베르나르 도는 피렌체에서 오래되고 유력한 가문 중에 하나이고 그가 하는 사업에 중요한 영향력을 미치는 Agolanti 가문에 Ginevra를 시집 보낸다.
이때 두 가문의 수장이 만나서 결혼 계약을 한 곳이 Loggia deli Agolanti 이다.

후에 Canto degli Agolanti 라는 대리석 현판이 생긴 곳으로 오랫동안 피렌체인들의 결혼에 대한 조건들을 조정하고 의논할 때 모이던 곳이되었다.
(<—현재 세례당이 있는 세례자 성 요한 광장( Piazza San Giovanni)에서 오래된 다리( Ponte Vecchio)로 가는 로마 길(Via Roma)과 첫번째 블록에 있는 토싱기 길 (Via Tosinghi) 모퉁이에서 있다.)




그 시대 가문의 여자들이 그러했듯이 Ginevra도 자신의 사랑을 가슴에 묻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Francesco와 결혼을 했지만, Antonio를 향한 사랑과 그리움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커져만 갔다.
잃어버린 사랑의 아픔으로 Ginevra는 슬픔과 고뇌 속에서 지냈다. 결혼 후 몇 주가 지나자 곡기마저 끊어버린 Ginevra는 이전의 아름다움과 생기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흡사 깊은 병을 앓고 있는 병자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한편 남편인 Francesco는 자신의 사업에만 관심이 있는 일 중독이었다. 이렇게 남편의 관심에서도 멀어진 Ginevra는 친척들의 관심과 의사의 처방에도 시름시름 앓다가 급기야 당시 1400년대에 유행하던 전염병인 흑사병으로 의심받고 고립되어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자신의 침대에서 곧은 자세로 누운 Ginevra는 반쯤 감긴 눈으로 숨이 거의 끊긴 상태로 발견되었다. 모두는 큰 슬픔에 빠졌고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Antonio는 깊은 절망에 잠겼다.

하얀 신부복의 옷을 입은 그녀의 시신은 당시의 관습대로 화려한 꽃으로 치장한 나무 판에 올려져 남편의 집에서 나와 피렌체의 두오모 (Santa Maria del Fiore)로 향했다.
장례식이 끝난 후 성당에서 Giotto의 종탑 바로 옆에 있던 Agolanti 가문의 묘지로 이동되어 해골들이 즐비한 무덤 안에 시신을 올려놓고 무덤을 덮었다. ( 당시 흑사병 때문인 잦은 죽음으로 따로 무덤을 만들지 않은 듯하다.)

그날은 칠흑 같은 어둠이 드리운 그달의 첫 번째 화요일이었다.
해골들이 사이에서 Ginevra가 갑자기 눈을 떴다.
살아있던 그녀를 죽었다고 오인하고 생매장을 했던 것이다.
그녀가 눈을 뜨자마자 느꼈을 공포는……. 굳이 설명을 안 해도….
공포에 파랗게 질린 Ginevra는 온 힘을 다해 자신을 덮고 있던 돌과 흙을 걷어내고 무덤 밖으로 기어나온다.
딱 봐도 귀신 복장의 하얀 옷을 입은 Ginevra는 두오모와 종탑의 오른쪽 광장에서 이어진 (오늘날 Via Campanile) 긴 길목을 지나 오케 길로( Via delle Oche) 접어들어 남편의 집이 있는 Via Toshinghi로 향했다. 힘겹게 문을 두드린 Ginevra는 위층 창문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남편을 보았다.
죽은 부인의 귀신이라 생각하고 매우 놀란 남편은 가슴에 십자가를 그리고 창문을 닫으며 하인들에게 소리쳤다. 절대 문을 열지 말라고…….
크게 실망한 그녀는 전혀 기력이 남아있지 않은 몸뚱이를 끌다시피 하여 그녀가 태어나고 자란 부모님 집으로 향했다. 옛 시장 광장 (현재 공화국 광장 Piazza Della Repubblica )쪽으로 창문이 나 있던 그녀의 집은 한 블록거리의 가까운 곳이었지만 무덤 속에서 깨어난 그녀에겐 꽤 먼 거리였다.
힘겹게 집에 도착한 그녀가 가족의 품을 그리며 문을 두드린다. 그녀의 어머니가 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창백한 얼굴과 흙투성이의 딸을 알아보지 못하고 귀신의 장난이라고 생각하여 서둘러 문을 잠가 버린다. 자신의 어머니에게서도 외면당하고 절망에 빠진 Ginevra는 더는 그 어떤 힘도 남아있지 않아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얼마가 지났을까? Ginevra는 마지막으로 그녀의 연인 Antonio를 보고 싶었다. 이럴 때를 위해 항상 남아있는 '젖 먹던 힘'을 짜내 Rondinelli가로 향한다.
한밤에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깨어 문을 연 Antonio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광경을 보고 너무 놀라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눈앞의 귀신 행색의 여인이 자신의 Ginevra라는 것을 알아채고 바로 집안에 들인다. Ginevra는 안도감을 느끼면서 Antonio의 품에서 쓰러진다.

쓰러진 Ginevra는 그로부터 나흘 동안 진짜 생사를 건 싸움을 시작했다. 죽음과 삶의 경계를 오가는 그녀 옆엔 Antonio가 있었다. 결국, 죽었다고 오해받을 만큼 조금의 기력도 남아있지 않던 그녀는 나흘 만에 깨어나 Antonio와 그의 가족의 지극한 정성과 치료로 점점 회복되어 갔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Ginevra와 Antonio, 두 사랑하는 연인은 같이 있게 되었다.
자신의 아내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은 Francesco는 Ginevra를 다시 집으로 데려오려 하지만 Antonio의 반대와 자신에게 무관심했고 자기 죽음보단 자신의 돈을 더 소중히 하는 남편에게 분노하는 아내 때문에 결국 Francesco는 그 둘을 종교 재판에 부친다.

결국, 부 대주교인 Vicario del Vescovo 앞에 불러 세워진 우리들의 세 주인공은 이런 재판 결과를 듣는다. "... che per essere stato disciolto lo primo matrimonio dalla morte, poteva la donna legittimamente passare ad altro matrimonio!". “죽음인해 첫번째 결혼에서 해방된 여인은 합법적으로 다른 사람과 혼인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재판의 결과로 Ginevra와 Antonio는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다.고….
역시 르네상스를 시작한 도시의 성직자는 뭐가 달라도 달랐다. 정말 극적인 이야기에 맞는 매우 인간적인 끝이다. 결국, 결혼은 죽음 때문에 끝나지만, 영원한 사랑은 죽음도 갈라놓은 수 없다는 필자가 좋아하는 참 로맨틱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왜! 전설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그 뒤에 피렌체 사람들이 매월 첫 번째 화요일마다 하얀 옷을 입고 두오모 근처 전 남편과 자신의 집을 헤매는 Ginevra 귀신의 모습을 목격했다고 할까?
아마도 원한이 남았거나 아니면 Ginevra가 뒤끝이 있거나?....